2024. 11. 15. 06:44ㆍ오르다/100대명산
▲(위의 글에 이어지는 글)
오대산 선재길 5코스 왕의 길.
상원사에서 끝나는 선재길의 마지막 구간은 왕의 길이다.
거리는 1.8km로 옛날 세조가 상원사 입구 계곡에서 목욕을 하던 중
문수동자를 만나서 피부병을 고쳤다고 하는 전설이 남아있는 구간이다.
그 후에도 세조는 이곳에 자주 행차하여 문수보살과 관련된 많은 전설을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왕의 길로 명명된 길이다.
▲전설의 진위를 떠나서
그 옛날에 왕이 이곳까지 행차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수고가 있었을지.
▲고도가 높아졌지만 길은 여전히 부드럽고
계곡의 계류는 더욱 청량하기만 했다.
무더운 여름에 걸어도 좋을 듯.
▲우리는 소박한 소원이 많은 민족.
저마다 작은 돌 하나 올려놓으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수많은 각자의 소원들 중에서 가장 많은 소원은
단연 자신보다 내 자식 아프지 말기를,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제 산길은 끝이 났다.
상원사 오르는 300m만 남았다.
울창한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
그러나 9km의 선재길 구간 중에서 유일하게 가파른 오르막이다.
▲단풍잎이 떨어져 계단이 붉게 물들었다.
먼 길 걸어 걸어온 수고한 나를 위해 붉은 주단을 깔아 놓은 듯.
레드카펫을 걷는 기분으로 마지막 종점 상원사를 향해서 오른다.
▲옛날 내가 10 살이 채 안되었을 무렵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병원이나 산부인과라는 말조차 생각할 수 없을 때였다.
어머님께서 밤중에 막내 동생을 낳으셨다.
할머님이 아기를 받으신 것이다.
그때 아버님은 참외밭 원두막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그래서 할머님께서 호롱불 하나 들려주시면서 나더러 아버님을 불러오라고 시키셨다.
참외밭은 산소가 군데군데 있는 야산을 지나고
다시 논두렁을 지나고 나서야 나오는 또 다른 야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어른들이 들려주시는 귀신 이야기, 도깨비 이야기가 주를 이루던 시절이었다.
귀신의 종류는 왜 그리 많고,
도깨비를 만났다는 사람들은 왜 그리 많았는지.
그래서 밤만 되면 온통 머릿속에 귀신 생각, 도깨비 생각뿐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묘지가 있는 산길을
호롱불 하나 들고 가야 하는 상황.
묘지가 있는 산길에 들어서자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도깨비를 만나면 왼발을 걸어서 넘어뜨려야 이긴다.
귀신은 불빛을 보고 나타난다.
호랑이는 불을 무서워한다.」
이야기 속 귀신과 도깨비에 대한 상식이 무작위로 떠올랐다.
그래서 귀신이 나타나지 않게 일단 호롱불을 껐다.
그 시절 산골의 밤은 얼마나 적막했던지.
아무리 사뿐사뿐 걸어도 내 발걸음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컸다.
그리고 그 발걸음 소리 뒤에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도 없이 뒤돌아 보기를 반복하며
겨우겨우 아버님이 계신 원두막에 도착했던 기억.
도깨비와 귀신은 어른도 감당하지 못할 텐데 아버님을 만나는 순간 왜 그리 안도감이 들었던지.
내가 큰일을 해냈다는 성취감과 안도감.
어린 나이의 기억이 이토록 생생한 건 아마도 그때의 무서운 충격이 컸기 때문 일 것이다.
단풍철도 지나고 평일 조금 늦은 시간.
그래서 9km를 걷는 내내 산길에서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간간이 나오는 인적 없는 울창한 숲길을 걷으며 문득 생각난 어린 시절
깊은 밤에 홀로 산길을 걸어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선재길의 '선재'는 깨달음을 향해 떠나는 동자승이었단다.
깨달음을 향해 떠나는 어린 동자승은
ㅡ얼마나 외롭고 또 얼마나 무서웠을까?ㅡ
아무튼 오대산 선재길 걷기는 그런 생각을 해보는 시간이었다.
ㅡ2024.11.06.오대산 선재길.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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