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들길에서 ㅡ

2023. 10. 9. 16:02photo essay ㅡ생각을 찍다.

▲계절은 돌고 돌아 또다시 가을의 한가운데에 와 있습니다.

가을.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한글 '가을'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우리말의 순수한 계절 이름은 한자의' 춘하추동' 보다 몇 배나 더 아름답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나라 계절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봄은 말 그대로 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봄은 '새순이 돋고, 새싹이 움트는 모든 것들의 시작을 보다' 라는 의미의 '보옴'에서 시작해서 봄으로,

여름은 열매가 열리는 계절이라는 의미의 '열음'에서 여름으로,

가을은 그 열매를 거두다는 의미의 '갓다'에서 '갓을→가슬→가을'로,

겨울은 추위를 피해서 집에 머문다는 의미의 '겻다'에서 '겻을→겨슬→겨울'로 바뀌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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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가을걷이가 한창인 황금들녘으로 자전거 라이딩을 나갑니다.

들판은 말 그대로 황금들녘입니다.

마치 황금으로 가득 찬 듯 한 황금들판 풍경.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풍경입니다.

가을 들판은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죠.

이보다 흐뭇하고 가슴 벅찬 풍요로운 풍경이 또 있을까요?

먹거리가 풍부한 오늘날에야 쌀의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쌀은 보물과도 같았습니다.

아니 보물 보다도 더 소중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봄, 여름에는 쌀밥은커녕 쌀 구경도 쉽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부잣집 아이들은 쌀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간식처럼 먹곤 했죠.

▲아무튼 이토록 풍요로운 황금들길을 자전거로 달려가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집에서 자전거로 10 여분이면 닿을 수 있는 들판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요즘 가을 들길에 나서면 황금벌판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왜가리가 한가로이 노니는 수로 풍경도 예술입니다.

▲들판 한가운데서는 콤바인이 추수를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동네의 행사처럼 시끌벅적했던 추수.

그 추수를 두대의 콤바인이 소리 소문 없이 해치우고 있습니다.

벼를 베는 날은 구수한 햇쌀밥을 논에서 먹을 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벼 베는 날 쌀밥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그날을 위해서 논 한 귀퉁이의 벼를 미리 베어서 솥에 넣고 찝니다.

아직 덜 영글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말려서 절구로 찧어서 만든 쌀을 올벼쌀이라고 했죠.

벼 베는 날 들밥은 그 올벼쌀로 지은 쌀밥이었던 것입니다.

올벼쌀은 찐쌀이기 때문에 그냥 먹어도 구수하고 맛있었죠.

▲올벼쌀의 구수한 추억에 젖어있는 동안에도 콤바인은 퉁퉁 대며 부지런히 벼를 벱니다.

지난봄 여름 동안 꿋꿋이 살아냈던 튼실한 벼 포기가 거대한 콤바인의 칼날에

마치 어린 날 시골 이발소에서 늙은 이발사의 이발기에 더벅머리 잘려나가듯 여지없이 잘려나갑니다.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자전거를 끌고 들길을 걷습니다.

볼 것들이 많아서죠.

▲걷다가 다시 이상화의 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구를 생각합니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 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물론 시인은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은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지만

오늘 이 풍경은 딱 그 시구와 어울리는 풍경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시구처럼 가르마 같은 논둑길입니다.

시인은 어떻게 그렇게 와닿는 표현을 찾아냈을까요?

▲가르마 같은 들길에는 여뀌꽃도 피고, 갈대꽃도 피고, 억새꽃도 피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풀꽃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이쁜 꽃들이죠.

▲이번에는 풍성한 개미취 군락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꽃이름에 별 관심이 없었던 때에는 그냥 들국화라고 불렀던 꽃입니다.

다양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논두렁 구경, 들꽃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습니다.

▲그렇게 걷다가 만난 어느 작은 동네 어귀입니다.

동네 어귀에서 생각지도 못한 멋진 꽃길을 만납니다.

▲요즘 동네 꽃길 조성은 누가 할까요?

내가 어렸을 땐 애향단이라고 일컫는 국민학생들이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마을 앞 당산에 모여서 마을 청소도 하고

꽃길 조성도 하곤 했었는데.

그렇게 해서 동네 어귀에 핀 가을 코스모스는 꽃이 귀했던 당시에는 유일한 꽃밭, 최고의 꽃길이었죠.

▲누군가 "과거로 인도하는 것은 추억이고

미래로 인도하는 것은 꿈"이라고 했던가요?

미래의 꿈을 꾸는 것도 즐겁지만

때론 과거로의 여행도 마음을 평온케 하는 듯합니다.

 

 

ㅡ2023.10.09.송산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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